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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 키스 더 브라이드
BL/GL 완결 10+
[BL] 키스 더 브라이드 ZIG /현대물, 서양풍, 시리어스물, 애절물, 수시점, 강공, 재벌공, 미인수, 다정수, 적극수, 외유내강수, 짝사랑수, 병약수, 계약, 할리킹, 외국인, 첫사랑, 재회물, 무심공, 냉혈공 <스패니시 브라이드>로 연결됩니다. 냉혈공/짝사랑수 주요 등장인물 주인수 : 신재원 전 테니스 선수로 한때 세계 챔피언 유망주였으나 불의의 사고로 꿈을 접고 현재 스페인에서 가정교사로 일을 하며 살고 있다. 언어에 천부적인 재능이 있어 어떤 언어든 빠르게 습득해 현재 9개 국어에 능통. 우연히 첫사랑이었던 하비에르와 재회 후 잊고 있던 사랑을 이루려 하지만 문제는 그가 호모포비아라는 것. 주인공 : 하비에르 엘리아스 레온시오 크리스티안 페르디세스 후안 단테 이 세르카스 데 코르데스…….(이하 생략) 전 테니스 선수권 대회 세계 챔피언으로 현재 공작가문의 계승자. 에스파냐의 심장으로 불리며 화려한 스캔들로 타블로이드를 장식하던 남자이지만 선대 공작이 죽으면서 3개월 내 결혼한 자식에게만 재산과 작위를 물려준다고 유언을 남겨 어쩔 수 없이 재원에게 프러포즈한다. 재원을 포비아로 오해하고 있으며 결코 자신은 사랑에 빠지는 일 따위는 없을 거라고 자신하지만…?! 타인의 기분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으며 원하는 것은 기필코 손에 넣고 마는 냉혈한. 발췌 “나와 결혼해. 당연히 승낙하겠지.” 오만하기 그지없는 청혼을 나는 멍하니 듣고 있었다. 눈앞의 남자는 긴 다리를 꼬고 앉아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는 똑바른 자세로 나를 바라보았다. 일명 ‘에스파냐의 심장’으로 불리는 남자, 하비에르 엘리아스 레온시오 크리스티안 페르디세스 후안 단테 이 세르카스 데 코르데스. 간신히 기억을 더듬었던 나는 곧 포기했다. 아체렌차의 공작인 그는 자그마치 38개의 이름을 가졌다. 그의 끝도 없이 긴 이름 중 그나마 내가 기억하는 건 저것이 다였다. 세계 테니스선수권 대회 전 월드챔피언으로 192센티미터의 장신에다 짙은 갈색의 머리칼과 에메랄드 그린의 눈동자를 가진, 전신이 섬세한 근육질로 이루어진 조각 같은 미남자. 흔한 표현이지만 그 이상 어울리는 미사여구를 찾기가 어려운 그는, 언뜻 지루해 보이기까지 하는 무심한 표정으로 나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직선으로 내리쬐는 지중해의 태양이 그의 어깨를 감싼 은은한 광택의 슈트 위로 조심스럽게 흘러내렸다. 소매에 달린 묵직한 다이아몬드의 커프스에 먼지조차 두려워 몸을 피할 듯한 반짝이는 이탈리아 수제화까지, 벌써 십여 년이 흘렀는데도 그는 예전과 똑같았다. 언젠가 타블로이드 기사에서 읽었던 문구가 떠올랐다. ‘품위’라는 단어를 형상화한다면 바로 이 남자가 만들어질 것이라고. 거기에 더해 ‘오만함의 극치’라는 표현까지도 포함한 형상이 되겠지. 무너지기 일보 직전인 낡은 건물의 한 편에 위치한 초라한 원룸에 앉아 있는 그의 우아한 모습은 흡사 꿈을 꾸기라도 하듯 비현실적이었다. 어쩌면 정말 꿈일지도 몰라. 나는 생각했지만 슬쩍 꼬집어본 손등은 눈물이 나올 만큼 아팠다. 고통과는 별개로 여전히 믿을 수 없는 현실 속에서, 나는 이번에는 내 귀를 의심했다. 벌써 수년에 걸친 짝사랑의 상대에게서 결혼하자는 말을 듣는다면 세상 누구라도 울고 싶을 만큼 기뻐할 게 당연하다. 그러나 반 광란 상태로 청혼을 받아들이기에 앞서 나에겐 중대한 문제가 남아있었다. “저, 돈 레온시오,” “하비에르.” 서늘한 음성으로 정정하는 그의 말을 무시한 채 나는 억지로 웃어보였다. “전 남자입니다만.” 정중한 지적에 하비에르가 엷게 연 입술 사이로 길게 담배 연기를 뱉어냈다. 직선으로 공기를 가로지르는 희뿌연 연기 너머로 그의 녹음을 머금은 짙은 녹색의 눈동자가 희미하게 기울어지는 것이 보인 듯했다. 명백히 나를 비웃는 그의 시선에 내 심장은 철컹, 둔탁한 소리를 내며 내려앉았다. “알고 있어.” 깊은 저음의 음성에 나는 어색한 미소를 지은 채 그대로 굳어버리고 말았다. 그럼 도대체 왜? 의문과 함께 섬뜩한 공포가 덮쳐왔다. 설마, 그런 건가. 삽시간에 등줄기로 오싹 소름이 돋았지만 냉정한 이성은 패닉에 빠지려는 몰상식한 감정을 냉혹하게 꾸짖었다. 그럴 리가 없다. 몇 해만의 재회가 아닌가. 내가 스페인에 있다는 사실조차 몰랐을 하비에르가 나의 숨겨진 마음을 알고 직접 여기까지 찾아오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무엇보다도. 나는 무심코 마른침을 삼켰다. 이 남자는 자신을 짝사랑한다고 해서 동정심을 보일 사람이 절대 아냐. 그런데 난데없이 찾아와서 청혼? 게다가 같은 남자인 나에게?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애써 이성을 찾은 내가 눈을 깜박이자 하비에르가 입을 열었다. 넋을 잃은 나의 귓가에 기억에 뚜렷이 각인되어 있는 그의 나른한 음성이 흘러들어왔다. “각하가 지난달에 돌아가셨지.” 선뜻 알아듣기 어려운 내용에 머뭇거렸던 나는 몇 초의 공백을 사이에 두고 의미를 깨달았다. 부친인 선대 공작을 말하는 것이다. 자신의 아버지를 타인처럼 지칭하는 표현은 아직 내겐 낯설었지만 그는 익숙한 듯 무심하게 담배를 입으로 가져갔다. 잠깐의 침묵을 사이에 두고 뿌연 담배연기가 허공을 기어 올라가는 동안 나는 겨우 평정을 되찾을 수 있었다. 비록 겉모습만이라고 해도. “기사 읽었습니다, 무척 유감이군요.” 판에 박힌 말이었지만 달리 할 말이 없었다. 그와 알고 지냈던 것은 십 년도 전의 일이다. 더욱이 그의 아버지인 공작에 대해서는 신문에 난 부음 기사를 본 것이 전부였다. 어색하게 격식을 갖춰 위로의 말을 건넨 내게 하비에르는 심드렁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덕분에 아주 곤란하게 됐어, 성가신 뒤처리를 맡게 됐거든.” 무심히 이어가는 그의 말투에 나에 대한 존중이라고는 전혀 없었으나 나는 깍듯이 예의를 갖춰 대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쨌든 그는 왕족이 아닌가. 비록 귀족이니 뭐니 하는 신분사회는 더 이상 유지되지 않는다고 해도 예의를 갖춰야 하는 상대임에는 변함이 없었다. 나는 그에게서 한 번도 상대를 존중하는 말투를 들어본 적이 없다는 사실을 떠올리며 애써 차분하게 응답했다. “안타깝습니다. 그래서 여기까지 오신 이유는…?” “말했잖아.” 하비에르는 나를 비웃는 것이 역력한 얼굴로 입가를 비뚤어뜨리며 후, 하고 짧게 담배연기를 뱉어냈다. “너와 결혼하겠다고.” “대체 그게 무슨….” 문득 그가 말한 ‘성가신 뒤처리’라는 말이 마음에 걸렸다. 설마 그것과 관계가 있는 걸까? 예상대로 그는 선뜻 말을 이었다. “공작가를 계승하기 위해서는 3개월 내에 결혼해야 해. 가문을 이을 거라는 확고한 의지를 보여주는 셈이지.” 하비에르의 단정한 미간이 희미하게 일그러졌다. “아주 고리타분한 방식이야.” 그는 집안의 전통이 무척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었지만 달리 수는 없는 듯했다. 그제야 나는 그가 난데없이 찾아와 결혼을 제시한 이유를 납득했다. 그러나 아직 가장 큰 의문은 남아있었다. “내가 스페인에 있는 걸 어떻게 알았습니까? 게다가, 어째서 하필 나에게 청혼을….” 목소리가 떨리지 않도록 애를 쓰다 보니 필요 이상으로 억양에 힘이 들어갔다. 누가 보아도 부자연스러운 말투였지만 그는 괘념치 않는 듯했다. 과연 그가 남의 기분에 신경을 쓰는 일이 있을까? 나는 생각하며 조심스럽게 대답을 기다렸다. 하비에르가 입을 열고 말을 하기까지 불과 몇 초도 되지 않을 짧은 시간 동안 머릿속은 수천 가지의 망상을 떠올렸다. 설마 날 계속 생각하고 있었나? 이 남자도 그때 이후로 날 잊지 못했던 건가? 어쩌면 설마, 혹시, 아주 조금이라도 나에 대한 마음이 있는 걸까? 그래서 이 기회에 내게 청혼을 할 생각까지…! 온갖 장밋빛 상상으로 부풀어 오른 머릿속을 하비에르의 차가운 음성이 냉혹하게 가로질렀다. “내가 알고 있는 가난뱅이는 너뿐이라서.” ……. “뭐라고요?” 반응을 하기까지는 얼마간의 공백이 필요했다. 풍선에 바람이 빠지듯 망상 속에서 깨어난 나는 그제야 눈앞의 현실을 직시했다. 하비에르는 담배를 입으로 가져가며 무심히 말을 계속했다. “애석하게도 조건에 맞는 결혼 상대가 없어. 너라면 적당히 돈을 주고 거래가 가능할 테지.” 기가 막혀 말이 나오지 않았다. 이 남자는 지금 돈으로 나를 사겠다고 말하는 건가? 청혼의 이유는 단지 내가 가난하니까?! 이렇게 황당할 수가, 이 남자가 나를 기억하는 이유가 이것이었다니. 잠깐의 충격이 지나가자 이번에는 어이가 없어졌다. “거리를 3분만 걸어가면 각하가 원하는 가난뱅이들을 100명은 만날 텐데요.” 비꼬는 말이었지만 하비에르의 대답은 현실적이었다. “남자가 침대에 기어들어오는 건 질색이야.” 순간 하비에르의 음성에 희미하게 감정이 섞였다. 언젠가 축제를 틈타 그를 연모하던 한 남자가 하비에르에게 기습키스를 했다가 반죽음을 당했던 일을 떠올린 나는 이내 물었다. “가난뱅이 여자를 고르면 되지 않습니까?” “하룻밤 불장난으로 애를 가졌다거나 하면서 귀찮게 굴면 곤란해.” 이번에도 주저 없이 나온 대답에 나는 선뜻 대책을 내놓았다. “섹스를 안 하면 되죠.” 어떤 의미에서는 나와 같은 조건이었다. 단지 여자일 뿐. 나의 지적에 하비에르는 미간을 찌푸리고 어이가 없다는 듯 되물었다. “섹스를 하지 않을 거라면 여자여야 할 이유가 없잖아.” 이번에는 정말로 할 말이 없어졌다. 요컨대 욕망을 자제할 생각은 없으니 애초에 여지를 주지 않겠다는 건가. 방종한 공작가 남자의 당당한 대답에 대꾸할 말을 잃은 내게 하비에르가 멋대로 말을 맺었다. “내일 변호사가 필요한 서류를 가지고 올 거야. 서명해서 그에게 줘, 오후에 시청에서 만나지.” “잠깐, 나는 아직 대답을…,” 황급히 그를 불렀으나 선뜻 일어선 하비에르는 나를 내려다보며 눈가를 얇게 기울였다. “서류를 보면 당장 하겠다고 말할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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